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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적한 서점에서 발견해 구입한 책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는 2009년 출간된 책으로 원제는 Berthe Morisot. 한국어 제목은 너무 식상한 느낌이지만 유명 화가는 아닌 것 같아 쓴 것 같다. 저자 아르망 풀로(18581940)는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미술사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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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1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베르투 모리조(1841~1895)가 당시 시대상황에서 화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은 미술학교에 입학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여성은 누드모델은 가능해도 남성과 함께 누드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물게 화가의 딸이 화가가 된 적은 있었다. 최초의 여성 화가로 일컬어지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그리고 안젤리카 카우프만, 비젤 브렌이 화가의 딸이다. 그 외에는 여성이 화가가 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벨트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태어날 때 아버지 에돔 티뷔르트 모리조는 당시 도지사에 임명된 부유한 관료였지만 한때 화가의 꿈을 꾼 사람이었다.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한 적이 있는 모리조의 아버지는 파리로 이사한 뒤 10대가 된 딸 3명 전원에게 미술교육을 시켰다. 둘째 미술선생님은 재능 있는 자매가 그림을 배우려 할까봐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평화로운 부자 환경에서 이건 혁명이고 재앙인데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악몽 같은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돼 있다고 대답했다. 스승의 화실이나 제자 집에서 배우는 방식으로 두 번째 에드마와 세 번째 벨트는 지속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부계의 재능뿐 아니라 모계의 혈통에도 화가가 있었는데, 로코코 회화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가 증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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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는 12살 때 언니들과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몇 명의 그림선생님이 있었다.그중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는 벨트가 스무 살에 만난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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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1796~1875)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화가이다.모두의 서정적인 풍경을 많이 그렸다. 1830년대 살롱전으로 유명해졌고, 1846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서 코로의 인기는 매우 높았고 최고로 인정받은 화가였다. 벨트도 존경하는 화가였지만 그림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아했다. 자연의 대기와 광선의 효과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우에유노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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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와 누나 에드마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 명작을 모사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던 중 1864년 관전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에드마는 1869년 결혼한 뒤 화가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벨트의 작품은 가족사라고 불릴 정도로 어머니 에드마를 자주 그렸고 결혼 후에는 남편과 딸, 그리고 친척을 모델로 삼아 여러 작품을 남겼다. 여자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가 힘든 환경이라 집안 내 모습이 대화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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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전후 루브르에서 그림을 그려 처음 만난 에두아르 마네는 자매 중 동생 벨트의 개성적인 외모에 호감을 갖고 모델이 돼 달라고 요청했다. 에드마, 혹은 어머니와 마네의 화실에 다니면서 관심이 풍경화에서 인물화로 확대된 벨트, 마네에게 벨트는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서로의 가족과도 함께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벨트의 어머니는 문화예술인을 초대해 파티하는 것을 즐겼고, 그런 모임을 통해 딸들은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게 된다. 시대를 앞서간 아버지의 미술애와 어머니의 힘, 그리고 딸의 열정이 합쳐져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874년 첫 인상주의전에 참가했던 벨트나 전시에 대한 혹평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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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말 벨트는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은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웨젠 마네와 결혼했다. 당시 여자의 나이가 33세인 결혼은 꽤 느린 편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결혼한 다음해에 남편 웨젠마네를 그린 것으로 창문에서 눈부신 광채가 느껴진다. 두 사람 사이에 딸 줄리가 태어난 것은 18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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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본 위 작품을 매우 좋아하지만, 다른 인상파 작품들과 함께 보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벨트 그림은 작은 사이즈가 많지만, 위의 작품은 큰 편이다. 모양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채 붓놀림이 얼마나 자유롭고 부드러운지. 날아가는 새의 날개처럼 가벼운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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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관 홈페이지는 그림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고 확대된 사진까지 정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구글의 아트앤컬처 사이트도 좋은 사진 자료. 8회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전시에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가한 벨트 모리조, 참가하지 못한 한 번은 1879년 딸 줄리의 출산 때문이었다. 이후 1880년대 화풍은 짧은 붓터치보다는 긴 터치 표현이 두드러져 유화뿐 아니라 수채화와 파스텔화 작업을 많이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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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화풍은 자유롭고 대담해져 형태가 선명하지 않다. 책에서 벨트의 화풍을 설명한 단어는 민감한 감각, 그윽한 빛 표현, 미묘한 색채, 활기찬 필치, 고전적 순수성 등이다.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색채와 유려하면서도 즉흥적인 선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그림. 벨트는 딸 줄리를 모델로 한 작품 몇 점을 남겼지만 딸에 대한 깊은 사랑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92년에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남편 웨젠마네를 잃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이후 작업에 더 매달린 벨트는 성공적으로 전시를 마치고 걱정 없이 화가의 길을 걸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남편의 사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줄리 마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자기 고아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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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 모리조의 일대기를 쓴 이 책은 1925년 나온 책을 번역한 것으로 화가 가족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벨트가 상류사회 여성이라는 편견으로 작품을 저평가하거나 취미로 그리는 일요일 화가로 취급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제약, 그리고 유언 때문에 부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현대미술로 가는 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한 비중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벨트의 많은 작품이 미술영상을 통해 미국에 가서 유럽의 부유층 사이에서 조용히 개인 소장하고 싶은 그림이 됐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작품 목록조차 작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책에 담긴 그림은 유명 미술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벨트의 그림을 찾아서 생각하는 생각은 감성적이고 미묘한 표현들이 꽃피우며 친밀하게 다가오는 봄의 햇살과 같다… (사진출처 : 유럽과 미국 미술관 홈페이지, 구글아트 & 컬처, 위키백과, 위키아트) & 벨트 모리조, & 인상주의 화가, & 인상주의 숨은 코모리조, & 알만프로, & Berthe Morisot,